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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희정, 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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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니이 2025. 1. 1.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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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에 올리려고 간직했던, 아끼는 책.

 
 

우리는 언젠가부터 위로도 조언도 아닌,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을 전해야 할 때 서로의 목뼈를 누르곤 했다.
술에 취한 어느 밤, 3세기 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을 것 같은 동아리 방의 낡고 더러운 소파에 기대앉아
장난처럼 시작한 그 행동은 어느새 둘만의 의식이 되어버렸다.
쓰다듬듯, 감싸안듯 가만가만 손을 가져가 상대를 보듬는 행위.
서로에게 분명한 충고나 조언을 직구로 던져야 할 때조차도 아둔한 그 행위만 반복할 뿐이었다.
나는 율이의 목뼈를 검지로 지그시 눌렀다. 율이는 순한 아이처럼 가만히 나를 올려다보았다.
어쩌면 우리는 보통 사람들보다 어른이 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걸리는 타입인지도 몰랐다.
―p.16
 
 
 
 
사랑하고 사랑받는 건 몇 살을 먹어도 좋은 법이야.
―p.26
 

 

― 무엇이든 들어주는 거지.
― 누구의 이야기를요?
― 누구의 이야기든지.
―p.31
 
 
 
 
그런 율이를 보고 있으면 나는 허기가 졌다. 애정에 목말랐다. 걸신이 들린 것 같았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 하지만 잡을 수도 만질 수도 없다.
율이는 나를 한순간에 들뜨게도 하고 한없이 무기력하게도 만들었다.
율이 앞에서 나는 그저 고분고분한 노예에 불과했다.
아니 거절당한 방문객이 된 기분이었다.
굳게 잠긴 문 앞에서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짖어대는 개가 된 느낌.
―p.54
 
 
 
 
과거란 참 묘했다. 그것은 지나간 한때가 아니었다. 그것은 언제나 나와 함께 있었다.
진하고 기다란 그림자처럼, 일종의 저주처럼 내 발끝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p.58
 
 
 

마음이 아팠다. 율이에게 잘못이 있다면 발가락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만든다는 것일 터였다.
곁에 있다면 마구 주먹질을 해주고 싶다. 날카로운 것으로 사정없이 찌르고 싶다. 억눌렀던 감정의 반발심일까.
율이를 좋아하는 마음을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삭이다보니 어느새 기묘한 감정으로 숙성되고 있었다.
율이에게 아픔을 주고 싶다. 놀라서 나를 돌아보게 하고 싶다.
바닥이 안 보일 정도로 깊게 구덩이를 파서 율이를 빠뜨리고 그 사실을 혼자서만 알고 싶다.
내 감정에 냄새가 있다면 아주 시큼한 냄새일 것이다. 음흉하고 야비한 냄새.
세상이 무대라면 그리고 내가 배우라면, 신은 나를 무슨 역할로 캐스팅한 걸까.
짝사랑 때문에 미쳐버린 음흉하고 야비한 단역 정도겠지.
―p.78
 
 
 
 
― 좋은 거야.
― 뭐가 좋아, 내 마음은 너덜너덜하고 내 눈은 짓물렀다고.
― 마음과 눈의 느낌을 아는 것. 그건 참 좋은 거야.
― 마음과 눈의 구성성분이나 요소 같은 것 말이야?
― 소중한 것을 잃고 마음에 구멍이 뚫린 것 같은 느낌,
퉁퉁 부은 눈을 하고서도 '아무 일도 아니에요'라고 미소짓는 느낌,
저 멀리 언덕을 넘으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손을 흔들며 나타날 것 같은 느낌,
그 사람이 웃어주는 것만으로 우주의 모든 애정을 받는 것 같은 느낌,
꼭 그 사람이어야만 하는 이유를 모아 밤새 태산이라도 쌓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그런 느낌에 흠뻑 젖는 시절을 마음껏 누려야 돼.
―p.79
 
 
 
 
― 공룡처럼 거대해지다가 언젠가는 '펑' 소리와 함께 멸종하고 말거야.
― 뭐가?
― 더 빠르고 더 부유하게 살고픈 사람들.
― 다 그렇게 살고 싶어하지 않아?
― 사람은 원하는 것으로부터 자기를 지킬 줄 알아야 돼.
―p.82
 

 

― 원하는 것을 자신의 공간에 단단히 붙잡아둘 수 있는 용기가 부럽네요.
칸트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 결국, 우리는 넘어진 곳에서만 일어설 수 있으니까요.
―p.106
 
 
 

― 참으로 오랜만이었지. 누군가와 얼굴을 마주하고 편안하게 구덩이 얘기를 한 게.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 이렇게 누군가와 얼굴을 마주하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면서
동감하고 오해하고 다시 화해를 하고 싶다고.
무엇보다 그녀의 웃는 얼굴이 좋았어. 초승달을 떠올리게 하는 웃음이랄까.
구름이 스르르 비켜나면서 살며시 드러나듯 애틋하게 빛나는 미소 말이야.
그래서 얘기했지.
― 뭐라고요?
― 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달라고.
―p.127
 
 
 
 
― 율아.
― 응.
율이는 항상 대답을 잘했다. 마치 누가 불러주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 내가 지금, 거기로 갈게.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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