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가 젖어 있는 것 같은데 비를 맞았을 것 같은데
당신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너지는 노을 앞에서
온갖 구멍 다 틀어막고 사는 일이 얼마나 환장할 일인지
머리를 감겨 주고 싶었는데 흰 운동화를 사 주고 싶었는데
내가 그대에게 도적이었는지 나비였는지
철 지난 그놈의 병을 앓기는 한 것 같은데
내가 그대에게 할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살지 않는 것 이 나라에 살지 않는 것 이 시대를 살지 않는 것
내가 그대에게 빗물이었다면 당신은 살아 있을까 강물 속에 살아 있을까
잊지 않고 흐르는 것들에게 고함
그래도 내가 노을 속 나비라는 생각
―내가 나비라는 생각 p.17
사람들 틈에 끼인 살아 본 적 없는 생을 걷어 내고 싶었다.
모든 게 잘 보이게 다시 없이 선명하게
난 오늘 공중전화통을 붙잡고 모든 걸 다 고백한다.
죽이고 싶었고 사랑했고
하늘을 나는 새를 보라는 성경 구절에도 마음이 흔들린다고.
그리고 오늘은 목요일.
죽이 끓든 밥이 끓든 나는 변하지 못했고
또 목요일.
형상이 없으면 그림이 아니야.
따귀 한 대에 침 한 번씩 뱉고 밤을 새우면 신을 만날 줄 알았지.
그림 같은 건 잊은 지 오래라는 녀석들 몇 명과
그들의 자존심과 그들의 투항과 술을 마신다.
그중에 내가 있다.
오늘은 목요일.
결국 오늘도
꿈이 피를 말린다.
그 꿈이 나한테 이럴 수가.
―목요일 p.30
비야
내 목을 조르지는 마라
여름 천변 한밤의 나방 떼처럼 쏟아져
새벽이면 퉁퉁 불어 눈조차 떠지지 않게 하지는 마라
지긋지긋한 연민이 흘러넘쳐 자고 나면 축축 늘어져
제대로 서 있는 잡풀 하나 없어도
비야
내 목을 조르지는 마라
그 길 위에서 사람들이 숨어 버린
그 길 위에서 나는 한 발짝도 떼지 못했구나
비야
내 발목을 붙잡지는 마라
헛바퀴만 도는 고물 트럭의 뒷모습이나
추억이고 뭐고 없이 나뒹구는 우산살과 별다르지 않게
내가 있겠지만 부끄럽게도
온몸 마디마디 환희를 새겨 넣지는 못했지만
비야
그래도 내 발목을 붙잡지는 마라
비야
날 살려라
―비야, 날 살려라 p.32
영혼이 아프다고 그랬다. 산동네 공중전화로 더 이상 그리움 같은 걸 말하지 않겠다고
다시는 술을 마시지도 않겠다고 고장난 보안등 아래서 너는 처음으로 울었다.
내가 일당 이만 오천원짜리 일을 끝내고 달려가던 하숙촌 골목엔 이틀째 비가 내렸다.
나의 속성이 부럽다는 너의 편지를 받고, 석간을 뒤적이던 나는 악마였다.
십일월 보도블럭 위를 흘러다니는 건 쓸쓸한 철야 기도였고, 부풀린 고향이었고,
벅찬 노래였을 뿐. 백목련 같았던 너는 없다. 나는 네게서 살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아침에 일어나면 떨리는 손에 분필을 들고 서 있을 너를 네가 살았다는
남쪽 어느 바닷가를 찾아가는 밤기차를 상상했다.
걸어서 강을 건너다 아이들이 몰려나오는 어린 잔디밭을 본다.
문득 너는 없다. 지나온 강 저쪽은 언제나 절망이었으므로.
잃어 버렸다. 너의 어깨를 생머리를. 막차 시간이 기억나질 않는다.
빗줄기는 그친 다음에도 빗줄기였고. 너는 이제 울지 못한다. 내게서 살지 않는다.
새벽녘 돌아왔을 때 빈방만 혼자서 울고 있었다. 온통 젖은 채 전부가 아닌 건 싫다고.
―참회록 p.68
쏟아지는 비를 피해 찾아갔던 짧은 처마 밑에서 아슬아슬하게
등 붙이고 서 있던 여름날 밤을 나는 얼마나 아파했는지
체념처럼 땅바닥에 떨어져 이리저리 낮게만 흘러다니는 빗물을 보며
당신을 생각했는지. 빗물이 파 놓은 깊은 골이 어쩌면 당신이었는지
칠월의 밤은 또 얼마나 많이 흘러가 버렸는지.
땅바닥을 구르던 내 눈물은 지옥 같았던 내 눈물은 왜 아직도 내 곁에 있는지
칠월의 길엔 언제나 내 체념이 있고 이름조차 잃어버린 흑백영화가 있고
빗물에 쓸려 어디론가 가 버린 잊은 그대가 있었다
여름날 나는 늘 천국이 아니고, 칠월의 나는 체념뿐이어도 좋을 것
모두 다 절망하듯 쏟아지는 세상의 모든 빗물.
내가 여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칠월 p.76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고 어머니는 보이지도 않은 길 끝에서 울었다.
혼자 먹은 저녁만큼 쓸쓸한 밤 내내 나는 망해가는 늙은 별에서 얼어붙은 구두끈을 묶고 있었다.
부탄가스 하나로 네 시간을 버티어야 해. 되도록 불꽃을 작게 하는 것이 좋아.
어리석게도 빗속을 걸어 들어갔던 밤.
잠결을 걸어와서 가래침을 뱉으면 피가 섞여 나왔다.
어젯밤 통화는 너무 길었고, 안타까운 울음만 기억에 남았고, 나는 또 목숨을 걸고 있었다.
알고 계세요 하나도 남김없이 떠나는 건 얼마나 아름다운지.
저지대의 나무들은 또 얼마나 흔들리는지.
내 사랑은 언제나 급류처럼 돌아온다고 했다.
―내 사랑은 언제나 급류처럼 돌아온다고 했다 p.78
내가 앉은 2층 창으로 지하철 공사 5-24 공구 건설 현장이 보였고 전화는 오지 않았다.
몰인격한 내가 몰인격한 당신을 기다린다는 것 당신을 테두리 안에 집어넣으려 한다는 것
창문이 흔들릴 때마다 나는 내 인생에 반기를 들고 있는 것들을 생각했다.
불행의 냄새가 나는 것들 하지만 죽지 않을 정도로만 나는 붙들고 있는 것들 치욕의 내 입맛들
합성 인간의 그것처럼 내 사랑은 내 입맛은 어젯밤에 죽도록 사랑하고
오늘 아침엔 죽이고 싶도록 미워지는 것
살기 같은 것 팔 하나 다리 하나 없이 지겹도록 솟구치는 것
불온한 검은 피, 내 사랑은 천국이 아닐 것
―내 사랑은 p.82
미안해, 난 너의 장례식에 가지 않았어 지하철 안에서 가슴이 뜨겁기는 했지만,
우리도 한번 이겨 봐야 되지 않겠냐고 비분하기도 했지만
마감 뉴스가 끝나고 자리에 누워도 대학 본관 앞 흑백사진 속에 너는 아무래도 너무 어려
잘 가. 그대의 손이 얼굴이 가슴이 두 팔과 다리가, 아무것도 끌어안지 않고
아무것도 체념하지 않도록, 인간의 삶과 인간의 죽음을 체념하지 않도록
그대는 그곳에 있어 열아홉 살 그대가, 힘없는 그대가, 힘없는 그대의 우주가 꽃을 피우고.
다시 또 어지러움 속에 사라져 버릴 때까지. 그대가 온전히 흙이 될 때까지 난 또 뜬눈이야.
―편지 p.94
우뚝 서 있어라. 운명처럼
그대를 사랑한다
어디에도 희망은 없으므로
―진부령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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