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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혜,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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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니이 2025. 3. 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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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대해 자꾸 논하고 싶은 게 제가 걸린 병이에요.
―괄호가 사랑하는 구멍 中

 
 

손톱에서 피가 나면 안심이 된다.
끝이 난 기분으로
지금 나는 일그러지고 있구나.

[······]

내 새끼손가락이 사소한 기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한참 뒤의 일이었고 주먹을 완전히 쥘 수가 없어서 다짐을 할 수가 없어요, 그렇게 핑계를 대기 좋았다. 살점이 떨어지면 비치던 핏방울이 유일한 경고신호처럼 느껴졌고
―물어뜯기 中


 

교수님은 내 졸업논문의 주장이 참신하지만 타당하지는 않다고 조심스럽게 지적하셨고

나는 단지 우울하다고만 했다.

교수님은 헛기침을 하며 한마디 하셨다.
자네, 시를 그만 읽어보는 건 어떤가?

[······]

시집을 읽다 잠들면 시 속의 목소리들이 꿈에서 들렸다. 소리들은 윙윙대며 내가 꾸는 꿈을 입 밖으로 꺼내면 죄다 끝장나버릴 거라며 겁을 줬다.

······너 그러다 큰일 나······
······그렇게 살면 큰일 나······

그러나 나는 기어이 써버리는 사람
논리도 없이
비약만 있는 미래를 꿈꾸고
망해버린 꿈들을 죄다 옮겨 적는 사람

이걸 토하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가죠?
―반납 예정일 中
 



죽어가는 방에서
잠자코 투명해지던
나의 노력
무용한 언어
멸망해버린 사랑
번짐
끝내 해독되지 않는 장면
―제2외국어 中




피가 잔뜩 묻은 손으로 장기를 모두 밖으로 꺼내 하나하나 소개해주고 싶던 시절이 있었어

[······]

이제 나는 안다
들뜬 기분으로 모든 걸 내어주는 일은 모두를 도망가게 한다는 사실을 나의 구멍을 들여다보면 너도 떠나가버릴 걸 잘 알아

[······]

근데 말이야
이게 내 진심이야
기어이 이어지고 마는 마음이 있다는 것
흐릿해져도 글자의 모양은 변하지 않으니까
흐릿한 마음을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여전하니까

사랑에 모양이 있다면
서로를 흐린 눈으로 바라보는 접힌 눈매의 모양일 거야
착각 없이는 무엇도 사랑할 수 없으니까
―그게 우리의 임무지 中




약간 느끼한 대사였지만
허무하게 반짝이는 맹신은 그때 우리가 나눠 가진 가장 값진 것

별을 억지로 이으면 천장에 상흔이 남았고
우리는 별이라는 단어에 쉽게 속았다
―잡종의 별자리 中


 

사랑을 시작하는 심장은
졸업식에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나타난
혈관이 튀어나온 손등을 제멋대로 상상한다

죄다 끝나버린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조급한 박동으로 뛰어나가고
넘어지고
―빈맥 中




사랑은 결혼의 충분조건이다. 나는 이런 순진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랑에 빠지는 일은 뺨을 얻어맞는 일과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다.
―우리는 못 말려 中


 

그제야 모든 일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어요. 만화책 속의 아이가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정당한 이유는 없다는 것. 얌전하게 웅크린 종양에게 왜냐고 묻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는 것을.

그냥 일이 그렇게 되어버린 거였죠.
어쩔 수 없이
그 아이는 그러한 포즈로 굳어지고 만 거예요.
―Principle of Sufficient Reason 中




누군가는 영혼의 구멍을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다고, 그러므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반론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구멍이 게걸스럽게 빨아들이는 것들을 보세요. 우리에게 빈 곳을 채워 넣으라고 명령하는 구멍의 중력. 비어 있는 것의 질량. 갈구하는 묵직함.

이것들을 느낄 수 없나요?

[······]

하나의 구멍을 가진 영혼을 주무르면 물론 도넛을 만들 수 있습니다. 영혼이 무르익을 때, 밀가루가 부풀어 오를 때 나는 찰나의 달콤한 냄새 같은 것. 살아 있다고 느끼게 하는 아주 잠깐의 풍경.
―구멍의 존재론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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