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게 슬픔을 갱신하는 일 같을 때
하필 꽃잎도 다 떨어진 봄날
떨어진 건 다시 되돌아가 붙지 않았다
깨진 엄지손톱이 자라지 않았고
연약한 건 딱딱한 것에 숨어 있었다
마음이 없는 것처럼 살면 뺏기지 않을 줄 알았어
―정중하게 외롭게 中
그때 뭐라 뭐라 말하고
너는 하기 힘들다 했다
살아가는 게?
사랑하는 게?
답은 같아도 재차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알아도 도리 없는 일이다
그게 시큼한 맛이라도
바람은 계속 능금을 키운다
맛없는 걸 알아도
일단 한입 베어 물고 뱉었다
사랑도 삶도 맛만 보며 살 순 없을까
―우리의 허무는 능금 中
친구는 가고 나는 남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마음은 왜 떠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좋았던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 건 무엇 때문일까 그런데 내가 계속 너처럼 느끼고 너는 계속 남처럼 구는 이유를 모르겠다 종이가 빡빡할수록 접으면 선이 선명하게 남고 깔끔하게 찢어낼 수 있는데 우리 둘은 재생지처럼 자를 대고 찢어도 계속 뭔가 더 뜯겨져나갈 것만 같다
―우리는 시간을 사랑으로 바꾸며 살았고 누가 먼저였을까 사랑과 바꾸긴 아깝다 생각한 사람은 中
함께 불행한 걸 행복이라 하지 않기로 했는데 역시 나의 불행은 걔랑 잘 맞는거 같더라 내가 우니 같이 벗고 서로 안아버렸지 사람이 따뜻한 게 가장 큰 저주 같았어
―시간이 없다고 말한 너와 겨우 만났지만 날 싫어하는 것 같고 헤어진 후에 가슴 가득 노을이 차는 것 같을 때 中
깨어나고
고요하다
고요로 닦을 수밖에 없는
어느 사실을 매일 마주한다
꿈보다 슬픈 것
나는 나를 살아가야만 한다
―행복의 한계 中
금가버리라지
깨진 것도 붙이는데
사람 사이야 뭐 어렵겠어
근데 언니, 안 붙는 건 진짜 안 붙더라
액상 접착제가 제일 잘하는 건
제 입구를 먼저 막아버리는 것
노력은 지난 노력을 뜯어낸 후에 가능했어
근데 언니, 엎지른 것도
사실 거의 담아낼 수 있잖아
금간 대로 사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나쁘게 사는 삶도 있는 거겠지
괜찮다 말해줄래?
나는 깨지진 않는 거잖아
길바닥에 던져져도 다시 일어나긴 하잖아
그게 문제였을까, 언니
멍은 없는데 왜 종일 박살난 마음이니
그 모양 그대로인데
왜 몇 조각 잃은 퍼즐 같니
완벽은 없다지만
언니, 나 괜찮다 말해줄래?
손금도 자주 씻어주면
운명도 붙는 날 있는 거겠지
―희망
비밀인데요
친구에게 사랑한다
말하고
이를 닦다 울었습니다
이를 닦을 힘이 남은 게 부끄러워서요
아직 누굴 사랑할 용기가 남았단 거니까요
내 숨이 조금은 더럽지 않았으면
하는 다짐처럼
웃기는 일이에요
웃진 않고 있지만요
죽음 같은 걸 생각하다
내 몸을 치울 걱정을 합니다
―수거 中
보기만 해도 뜨거운데 보이는 것만큼 뜨겁다 말하시는 게 웃겨 웃었습니다 한잔 내려주신 차를 조용히 마시고 다시는 찾지 않았습니다 아직 차의 맛을 모르고 기다림을 모르고 그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인생이 간편할 순 없지만 그것까지 복잡한 걸 견딜 수 없었습니다
―팽주(烹主)가 손을 포기하면 차가 훨씬 맛있습니다
살아가며 사랑하는 일에 슬픔은 필연적이기에 그로 인한 상실과 슬픔 또한 여러 번 반복된다. 그리고 아무리 겪어도 슬픔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시인은 여러 종류의 슬픔이 각각 고유하게 존재할 수 있도록 각별한 노력을 들인다. 거기에는 반복되는 슬픔에 무뎌지지 않기를 희망하는 마음이 있다.
―해설; 슬픔을 기적으로 만드는 사람, 소유정(문학평론가) 中
사는 일에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 잘 먹고 잘 자는 기본적인 일상의 조건들에 꽤 많은 공을 들여야만 건강한 삶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상을 유지할 수 없게 하는 상실이 찾아오면 소소한 행복은커녕 끝없는 불행을 말할 수밖에 없어진다. 그렇기에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나는 나를 살아가야만 한다”는 말은 생의 의지를 간신히 다잡아보는 다짐인 동시에 자신의 행복을 바라는 필사적인 주문이다.
―해설; 슬픔을 기적으로 만드는 사람, 소유정(문학평론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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